청년/자녀교육

자녀교육의 분명한 목표

 

아이를 잘 키운다는 건 ?

 

동네 놀이터에서 만나는 우리 막내 또래의 아이들을 보면 대부분 맞벌이 가정에, 할머니나 도우미 이모님의 돌봄을 받고 있다. 하지만 일하는 엄마들이든, 전업주부이든, 자녀 교육을 위해 어린 나이부터 최선을 다하는 건 다르지 않다. 주말마다 발품을 팔고 다니며 좋다는 학원 정보를 알아내느라 바쁘고, 좋다는 건 다 시킨다. 다들 안쓰러울 정도로 열심히, 온갖 노력을 자녀를 위해서라면 아끼지 않는다.

 

도대체 어떤 교육 목표를 가지고 있기에 저런 수고를 아끼지 않을까 문득 궁금했다. 적어도 아이를 노벨상 수상자나 세계적인 인물로 키우고 싶은 열망이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동네 엄마들과 대화하면서 뜻밖의 대답을 많이 들었다. 아이가 탁월하기를 바란다기보다, 그냥 중간만 가더라도 평범하고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거였다. 평범? 행복? 중간? 너무 막연하고 소박한 거  아닌가. 부모들이 엄청난 시간과 돈과 노력을 자녀 교육에 들이는 데  비해,  목표가 의외로 뚜렷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녀 교육을 잘 시킨다는 게 뭘까? 이 질문 앞에서 대부분의 부모들은 막연하다. 그래서 ‘남들 하는 만큼’이 기준이 되고, ‘옆집 엄마’나 육아 인플루언서가 쉽게 가까운 목표(?)가 되어 버린다.  내가 만나 본 크리스천 부모들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자녀를 어떻게 교육해야 하는지 성경적인 답을 찾거나, 하나님은 내 자녀를 어떻게 기르기를 원하실까? 라는 본질적 질문을 던지기보다, 다른 엄마들을 쫓아가고 세상에서 앞서간다는 방법을 좇아가기 바쁘다. ‘이건 세상이 앞서고 있는 부분이니까... 신앙도 좋지만 남들 하는 만큼은 해야 하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 자녀를 위해 가장 좋은 것을 예비하시고, 세상에서 승리하는 자녀가 되게 하신다는 걸 실제로 잘 믿지 못한다. 자녀교육에 있어서만큼은 신앙 따로, 삶 따로다. 

 

주위의 크리스천 청년들, 청소년을 보면, 이런 부모님들의 마음을 거울처럼 비춰주곤 한다. 겉으론 착하고, 별 문제 없는 아이들이지만 신앙 안으로 깊이 들어오지 못하고 주변부를 맴돈다. 세상적으로 확 멀리 가지도 못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께 깊이 들어오지도 않는 채 경계선상에 머무는 것이다. 하나님께 깊이 들어오자니 세상적으로 포기해야 할 게 너무 많아 보여서 그렇다고 한다. 내가 포기해야 것보다 하나님을 믿어서 얻는 리워드가 더 커보여야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데, 그런 리워드가 잘 보이지 않는거 같다. 그리스도인이 아니어도 세상적으로 잘나가는 사람, 행복해 보이는 사람,  그럭저럭 잘 사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자녀교육의 목표가 되면 안 되는 것

 

많은 부모들이 우리 자녀가 행복하기만을 바라고 자녀를 키운다. 그러나 행복은 자녀교육의 목표나 기준이 될 수 없다. 행복(happiness)이라는 단어 자체가 happen(우연히, 의도치 않게 어떤 일이 일어나다)란 동사에서 나왔다고 한다. 행복이란 애써서 노력하고 의도한다고 얻어지는 게 아니라, 예기치 않게, 그냥 주어지는 것이란 의미다. “ 행복은 다른 높은 가치를 추구할 때 따라오는 부산물이다. 행복한 삶이 목표가 되면 오히려 행복은 더 멀리 달아난다 ” 행복 연구 전문가들의 말이다. 현명한 부모라면, 왜 그렇게 자녀에게 좋다는 걸 다 시키려고 애쓰느냐는 말에 ‘아이가 행복하길 바래서’라고 대답하지는 말아야 하겠다.

 

자녀가 평범하게만 컸으면 좋겠다는 바램도 교육의 목표가 될 수는 없다. 평범하다는 기준이 너무 막연하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생각해서, 이런 막연한 목표로 교육이 올곧은 방향으로 갈 수 있을까? 유행과 시류, 남들과의 비교에 밀려 표류하기 딱 좋을 것이다다.

 

강남 엄마들한테 왜 굳이 강남에 와서 자녀를 키우려고 하느냐 물으면 그래도 공부 잘하는 아이들 틈에서 중간을 하는 게 다른 곳에서 중간하는 것보다 낫지 않냐는 대답을 종종 듣는다. 평범한 아이가 목표라고 소박하게 말하지만, 사실은 내심 높은(?) 기준을 가진 거다. 하지만 이 기준도 변수가 너무 많다. 주변에 우리 아이보다 월등히 앞서는 아이들이 있으면 내 아이는 평범에도 못 끼는 게 아닌가 불안하고 초조해진다. 그래서 실제로는 평범 이상의 재능과 실력을 가진 아이들이 스스로를 ‘아무것도 못하는 찌질이’로 인식하는 경우도 많이 본다. 평범이란 부모의 소박한 바램(?)이, 자존감이 낮은 아이를 만들어내는 슬픈 현실이다. 

 

 

그렇다면, 내 자녀를 일류로 키우겠다는 '노골적인 야망이나 목표를 갖는 건 어떨까? 자녀를 무섭게 몰아쳐서 엘리트로 키워낸 중국식 ‘타이거 맘’이나, 몇 해 전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스카이캐슬>에서 '피라미드 교육론'을 들먹이며 자녀들을 닦달하던 일류병 아빠가 그런 예다. 꼭 그런 극단적 예가 아니더라도, 많은 부모님들이 우리 아이가 할 수만 있다면 일등을 하면 좋겠다는 마음을 은연 중 가진다. 하지만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것만을 목표로 하는 교육은, 인간성에 엄청난 뒤틀림을 가져올 수 밖에 없다. 늘 남을 짓밟고 올라가야 하니, 인간이 원래 지음 받은 목적인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고, 남을 배려하고, 더 높은 가치를 위해 헌신하고, 다른 사람과 함께 협력하는, 인간만이 가진 순기능이 다 억눌려진다. 그런 안타까운 사례를 목회 현장에서 수없이 만날 수 있었다.

 

자녀가 자신의 재능과 잠재력을 찾아 성장하는 건 좋지만, 부모가 앞서가면서 내 자식을 ‘일류’로 만들겠다고 하면 잃는 게 너무 많은 걸 본다. 탁월함이란 그런 식으로 인위적으로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다.  ‘엘리트병’이 든 아이들은 최고가 아니면 아예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소중한 시간과 재능과 기회를 허비하면서, 자기 자신과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한다. 똑똑한 아이가 더 위험하다는 걸 부모들은 알아야 한다. 

 

 

자녀 교육의 더 나은 목표 :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

 

평범도, 행복도, 일류도 아니라면 자녀교육의 더 나은 목표가 무엇일까? 성경이 말씀하는 자녀교육의 목표가 무엇인지 돌아가야 한다. 성경은 무엇보다 마음과 힘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로 양육하라고 명령한다(신6:4-7).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은 믿음으로 순종하여, 모든 선한 일을 능히 할 수 있는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라고도 한다(딤전3:16-17)이다. 교육의 뿌리와 밑바탕에 하나님 사랑이 있다.

 

왜 우리는 하나님 사랑을 최고의 목표로 삼아야 할까?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닮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면 하나님의 지혜와 성품과 능력을 닮아가고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 하나님보다 못한 것을 사랑하면 그 다른 것을 닮는다. 돈을 사랑하면 탐욕스러워지고, 성공과 성취를 사랑하면 교만하고 비인간적이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절대적인 사랑의 대상이나 삶의 최우선순위가 될 수 없기에 하나님을 최고의 자리에 두고 마음과 힘과 뜻을 다해 사랑하라고 하신 것이다.

 

부모라면 우리 자녀가 인생의 어떤 어려움도 잘 헤쳐가고,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도록 기여할 수 있고, 우리 손을 떠나서도 계속 성장하고 열매 맺는 삶을 살기 바랄 것이다. 그러나 우리 힘만으론 이 목표를 다 이룰 수 없다. 자녀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분의 말씀을 순종하도록 힘써 가르치면, 하나님께서 그 인생을 붙드시고,  말씀의 빛으로 자녀의 길을 인도해 주시리라 믿고 맡길 뿐이다. 부모가 자녀를 놓아줄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손에 맡겨드리는 것 뿐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 자녀를 책임져 주신다. 세상에 맡긴 자녀는 되찾을 수 없지만 하나님께 믿음으로 바친 자녀는 하나님이 부활의 능력으로 되살려 돌려주실 것이다! (창22:7-14) 

 

칼비테라는 독일의 평범한 시골 목사가 쓴 <칼비테의 자녀교육>은 페스탈로치와 몬테소리에게도 큰 영향을 끼친 자녀교육서의 ‘고전’이다, 칼 비테의 아들은 10살에 대학에 입학했고 12살에 박사학위를 받았는데(기네스북 최연소), 그때까지 아버지가 따라다니며 계속 보살펴 주었다. 하지만 아들이 16살이 되었을 때, 칼 비테는 아이의 교육이 완결되었다고 생각하고 떠나보낸다. “ 아들은 하나님과 양심에 따라 홀로 서기를 하고 있다. 그래서 내 관점에서 보자면 아들의 교육이 완성되었다고 하겠다.”

 

자녀가 스무살이 되고, 서른살이 되어도 자녀 주위를 떠나지 못하는 오늘날의 부모들과 대조되는 지점이다. 진정한 자녀교육의 완결은 자녀가 명문대를 가고, 좋은 직장을 얻고 박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 깊이 새겨진 주의 말씀에 따라 이 세상에서 뿐 아니라 영원까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도록 자녀를 구비시키는 것이다. 아이가 부모의 눈과 통제를 벗어난 곳에서 무슨 일을 할지 걱정이 되어 일일이 간섭하고 잔소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복음에 순종하도록 힘써 가르쳐, 성령의 인도와 지배에 맡겨 드리는 것이다. 그런 자녀가 세상에서 낙오자가 될까?  성경은 그런 자녀가 세상이 감당치 못할 것이고, 세상을 다스리고 세상을 이기는 자녀가 될 것이라고 약속한다. (요일 5:4-5, 레 26:8-9)  

 

 

문제는 우리다.  하나님의 약속을 머리로는 끄떡하고 입술로는 '아멘'하지만, 삶 속에서 정작 나의 문제로 맞닥뜨리면 잘 믿지 못한다. 그래도 세상 사람들이 하는 최소한은 따라가야지 하고 플랜 A, 플랜 B를 세우는 거다.

아이가 뭘 잘 할지 모르고 불안하니까 코딩도 시켜보고, 영어는 기본으로 가르치고, 수학도 쳐지면 안 되고, 중국어는 필수라니까 해야 하고, 체력도 길러야 하니 운동도 시키고, 이렇게 목록을 늘려간다. 아이도 힘들고 부모도 피곤하고 불행해지는 길을 ‘다들 그러니까 어쩔 수 없다’고 위안하며 스스로 찾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보다 못하거나 평범하고 중간 정도만 하라고 우리를 불러 자기 소유로 삼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보배로운 백성으로, 세상의 빛으로 부르셨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표와 기대는 중간이 아니라, 탁월함이다. 그런데 탁월함이란, 하나님께 뿌리내린 존재의 밑바탕에서부터 차근차근 자라서 거두는 열매이지, 결코 그 자체만을 목표로 해서 만들어지는 결과가 아니다. 부모가 미래를 예측하고 대비하고 기획하고 완벽한 플랜을 짜서 아이의 유능함을 창조해 낼 수 있다는 건 착각이다. 오히려 부모님들이 이렇게 자조 섞인 푸념을 자녀에게 하는 걸 자주 듣는다. ‘ 내가 너 위해서 쏟아 부은 과외비가 몇 억인데, 네가 공부를 이것 밖에 못하니?’

 

 

부모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저 농부와 같이 뿌리고 심는 존재이다. 아이의 뿌리와 삶의 기둥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 안에 단단히 박히도록 가꾸어주면서 인내하고 기다리면, 열매는 하나님이 거두게 하신다.  그 열매는 아이의 결에 따라 제각각 다르며, 누구도 똑같을 수가 없다. 부모가 예측할 수도 없다. 그래서 자유롭다. 나처럼 자녀를 '설렁설렁 대충'키우는 엄마들에게 사실 이건 복음이다. 내가 자녀의 미래를 위해 많은 것을 해주지 못해도, 가장 중요한 한가지에 집중하면, 자녀의 인생에 하나님이 열매를 맺게 하신다는 것, 얼마나 복된 소식이고, 소망인가. 그냥 이 믿음에서 흔들리지만 않고, 잘 버티기만 하면 된다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성령이 기뻐하시는대로)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원한 것을 거두리라 ... 포기하지 않으면 때가 이르매 반드시 거두리라 " (갈 6: 7-9)

 

 

하나님의 선하신 능력, 복음의 능력을 믿는 믿음이 이 복잡하고 힘든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유일한 위안이고 힘이다.  ‘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6-17) 바울은 모두가 복음을 부끄럽게 하던 시대에도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복음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삶의 부가물이나 액서사리가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부분을 제대로 작동하게 하고 회복시키고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해법이기 때문이다. 

 

구원얻는 믿음은 천국 가는 티켓을 보장해주는 안전 보험 정도가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어렵고 골치아프고 답없는 문제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들어 오게 하는 Key(은혜의 문고리)이다. 믿음에서 시작해서 믿음으로 마치는 구원의 여정 속에 우리의 자녀 교육이 함께 있다. 믿음의 부모라면, 교육의 목표도, 방법도, 과정도 믿음이어야 한다.  '내 자녀가 세상에서 도태되지 않을까' 라는 불안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자녀를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로 키우려는 목표를 다른 무엇에도 양보하지 않을 때,  '약속의 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서지현 사무국장 (가정의 힘 교육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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